안녕하세요. 피스모모의 '달'입니다.
지난 주, 평창올림픽 폐막을 이틀 앞두고 강릉 올림픽 파크에 다녀왔어요.
청량리역에서 강릉까지 1시간 30분, 예전에 버스를 타고 돌아돌아 멀미하며 가던 길을
단숨에 지나치는 고속열차를 타고 가자니 참 새삼스러웠습니다.
강릉역을 향해 가는 길은,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이었어요.
고속열차가 생겨나면 주변의 자연환경은 훼손될 수밖에 없는데
평창, 진부, 강릉주민들에게는 지역경제와 문화, 기회의 측면에서
굉장한 자극이자 변화가 되겠구나 싶었지요.
제 고향은 강원도 춘천인데요.
강원도 사람으로 살아오는 동안 느끼게 되었던 '어떤 소외감'이 늘 있었습니다.
국가 시책에서 항상 버려진 것 같은 곳, 어떤 형태의 발전에서든 배제된 곳,
아니 배제되었다기 보다는 그냥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곳이구나 생각했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3층 교실 창가에서 친구들과 맞은 편 산을 바라보며
우리 무조건 저 산을 넘어서 '인서울(In Seoul)'하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도
이런 소외감이 기저에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강원도만의 이야기는 아닐거예요.
서울과 수도권 중심성으로부터 제외된 많은 지역에서
사는 분들은 비슷한 경험이 있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림픽 유치이야기가 처음 나왔던 그 때,
강원도민이었던 저는 대찬성이었습니다.
(지금은 서울시민을 거쳐 경기도민이 되었습니다.)
첫번째 좌절, 두번째 좌절 이후 복잡한 내막들이 드러나고
'가리왕산' 이슈를 접하면서는 더 이상 찬성하기 어려워졌지요.
그 사이 올림픽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도 많이 달라졌고요.
3일간의 경기를 위해 큰 흉터를 떠안은 가리왕산을 보면 마음이 너무 쓰려요.
올림픽이 끝난 이후, 평창과 강릉 그리고 그 지역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 걱정도 되고
한 편으론 이 일을 계기로 건강한 변화들이 생길 수 있지는 않을까 여러 마음이 됩니다.
이런 복잡한 생각 속에서 강릉역에 도착했어요.
강릉역부터 올림픽 파크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였는데요.
너무나 잔잔해보이는 강릉의 일상풍경과 올림픽이 그다지 어울려보이지 않았어요.
여기서 올림픽 하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파크 입구에 가까워지자 귀여운 수호랑이 반겨주었고
입장권을 사기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정말 높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이어서 그런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더라고요.
각국의 언어로 적힌 환영인사와 펄럭이는 국기들,
다양한 나라의 선수들과 언론들, 관람객들이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는데요.
파크 안을 둘러보자니, 경기장 외에 파크를 채우고 있는 시설들은
올림픽을 후원하는 대기업의 전시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펄럭이는 국기들과 커다란 코카콜라 자판기 모양의 부스,
거대한 프렌치프라이 모양의 맥도널드,
돈 없이는 진행될 수 없는 올림픽 산업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던 현장이었어요.
그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긴 줄을 바라보면서
흡사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변화들의 방향성에 대해 질문하기에는
당장 눈에 보이는 화려함들에 압도되기가 훨씬 쉽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가시화되는 것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변화들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우리의 일상은 너무 분주하고 바쁘니까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오던 것들을 여전히 '발전'이라 부른다면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은 그저 구호로 남을 수밖에 없을 텐데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만 하는 걸까요?
***
국기들이 펄럭이고,
수많은 사람들과 대기업의 전시관들로 화려한 그 곳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전시가 하나 있었습니다.
저의 지인이자, 좋아하는 작가님이 전시에 참여하시기에 보러갈 계획이었는데,
강릉을 향하던 중에, 피스모모의 연구기획팀장 하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시리아 동구타 상황 소식을 들으며 관련 자료를 찾았는데
강원국제비엔날레에서 시리아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고 하니
강릉에 다녀오는 김에 작품을 보고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강원국제비엔날레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2018 강원국제비엔날레’ 올해의 주제는 ‘악의 사전(The Dictionary of Evil)’인데요.
포스터 중앙에는 이번 비엔날레의 상징인 “뫼비우스의 띠”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와, 포스터 예쁘게 잘 나왔다고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전시 작품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면서
비엔날레 포스터에 담긴 “뫼비우스의 띠” 형상이 잔상처럼 따라다니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번 비엔날레는 ‘악(Evil)’이라 이름 붙여지는 인류의 비극적인 경험들을
예술이라는 통로를 통해 관객 앞에 현현하는 현장이자
관객이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옮겨두었는데요.
제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멕시코 작가 호아킨 세구라(Joaquin Segura)의 국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었습니다.
올림픽 파크에서 방금 마주하고 왔던 각국의 펄럭이는 국기들이
불에 그을리고 찢어진 채로 매달려 있는 모습,
바깥의 풍경과 너무나 대비되는 그 모습에 눈이 한참 머물렀습니다.
저 국기가 무엇이기에 우리는 그 앞에 맹세하는가.
‘우리라는 공동체‘를 상징하도록 자리를 내어주는가
‘우리’를 규정하고 ’단일함‘을 추구하는가.
국가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아닌 이름들은 쉽게 잊혀지고 버려지는가.
***
강원국제비엔날레에서 두 명의 시리아 작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압달라 알 오마리(Abdalla al Omari) 와 타만 아잠(Tammam Azzam).
압달라 알 오마리는 ‘배(The Boat)’라는 작품에서
커다란 보트에 타 있는 난민들의 모습을 표현했는데요.
얼굴 없는 이들 사이에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습니다.
독일총리 메르켈, 미국 전 대통령 오바마, 러시아 대통령 푸틴, 캐나다 수상 트뢰도,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그들이 저 배에 탈 일도 없겠지만 저 배에 만약 탔다면 이렇게 잊혀질 수도 없었겠지요.
들리는 목소리와 잊혀지는 목소리들,
기억되는 이름과 잊혀지는 이름들의 대비가 쓰라렸습니다.
타만 아잠(Tammam Azzam), 시리아 태생의 작가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작가라고 하는데요.
타만 아잠은 무채색의 아크릴화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풍경을 그려두었습니다.
색채,라고 말하기 힘든 어두움. 잿빛으로 가득찬 도시, 무너져내리는 건물로 가득한 캔버스.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층과 층 사이에
혹시 누군가 피신해 있지는 않을까, 작가가 그런 누군가를 그려두지는 않았을까.
그림에 담긴 한 층, 한 층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면서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동구타에서는 지금도 폭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엔의 휴전결의안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정부군의 공습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지난 2월 18일부터 9일간 동구타에서는 약 60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제는 파편과 재에 뒤덮인 어린아이들이 산소호흡기로 호흡하고 있는 사진과 함께
염소가스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공격이 있었던 것 같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평창에서 ‘평화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인들의 ‘축제’라는 것이 열리는 동안
시리아에서 죽음의 공포를 겪어낼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비명은
불꽃놀이와 탄성, 응원소리와 환호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비단 올림픽 때문만은 아니지요.
시리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잊혀진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학살에 대해서는 어째서 이렇게 조용할까요.
2년 전, 시리아 상황에 연대하려는 단체들이 모여
광화문 촛불집회가 진행되는 곁에서 시리아의 죽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자리를 마련했었습니다.
그 자리를 마련하면서도,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순간순간 무력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나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리아의 고통은 진행형입니다.
누군가는 인간의 폭력성은 본성이고 인간은 본래 악하니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사는 것은 그런 것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최근 바다를 건너와 한 끼 식사를 함께 했던 저의 동료는 눈을 반짝이며 제게 말했습니다.
“평화는 폭력에게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야.”
‘악’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라 이름 붙이는 이 행위가 가지는 상징은 중요하니까요.
이번 전시를 보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악의 악순환',
폭력으로 가득찬 뫼비우스의 띠에 뒤엉켰을지라도,
아득하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끝”을 응시하며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그려내는 또 다른 뫼비우스의 띠를 굳이 새롭게 발견하고 붙잡고 싶었습니다.
때때로 또는 자주 무력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개인들은 사실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무력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계속해서 손을 내미는
그 작은 몸짓들은 실처럼 가느다란 바람으로 누군가의 눈물을 말리고
추운 겨울, 믿기지 않을 만큼 따스한 햇볕 한 조각이 되어 누군가의 몸을 녹입니다.
평창 올림픽 개막식에서 울려 퍼졌던 “Imagine”이라는 노래와
독수리처럼 커다랗던 비둘기의 모습이 조금 생뚱맞아 보였던 것은
올림픽 정신이라 말하는 화합과 상생, 평등과 평화, 차이의 극복이라는 가치들이
사전적인 의미로만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존 레넌은 “Imagine”에 이런 말들을 담아두었습니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우리 발아래 지옥이 없고
우리 위엔 하늘만 있는 거예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세요.
누구를 위해서 죽을 필요도, 죽일 이유도 없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봐요
이번 올림픽은 남과 북의 지난 10년의 단절을 딛고
다시금 교류를 시작하는 소중한 계기가 된 것이 분명하지만
당장 올림픽 종료 후 예상되는 상황들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만큼
어느 하나의 의미로만 고정시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번 올림픽에서 이야기된 ‘평화’의 의미를
한반도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남북의 분단만큼이나
팔레스타인의 분리장벽도
시리아의 고통도, 로힝야족의 아픔도
모두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니까요.
수호랑이 너무 귀엽고 반다비가 너무 귀엽지만
그 귀여운 마스코트들 덕분에
기억되어야 할 존재들이 잊혀지고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마음 놓고 좋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수호랑과 반다비가 너무 좋은데요. 흑…
이렇게 귀여움 앞에 무력하고
편리함 앞에, 안락함 앞에 무력한 저와 같은 존재들이
무력함을 넘어 무엇이라도 하려는 그 마음들이
‘우리’라는 단일한 공동체, ‘국기’로 상징되는 특정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차이를, 국경을, 불안을 넘어서기를 온 마음으로 바랍니다.
말로만 세계시민이 아니라
세계의 고통을 내 것으로 껴안는 경험이
나를 또 내 곁의 당신을 구성하기를요.
+부록
1. 수호랑과의 사진, 저도 한 번 찍어보았따….
2. 피스모모 멤바들이 추천해 준 글 제목은 대략 이랬따아..
3. 강원국제비엔날레는 사진촬영이 허가된 전시였어요.
4. 피스로그(Peace+log)는 피스모모 사무국 멤버들의 생각과 경험의 기록을 모아두기 위한 말머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