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부터 남태령까지, 응원봉과 함께한 심화과정
피스모모를 만난 약 10년 전부터 모모에서 은은하고 미세하게나마 배움을 쌓아왔다. ‘평화교육’을 내 삶의 정중앙에 놓은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평화’와 ‘교육’은 언제나 중요한 하나의 축으로 삼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작은 배움들이나마 긴 시간만큼 켜켜이 쌓였고, ‘좋아좋아’ ‘서로 힘주기’ ‘뭐든지 괜찮아’ ‘느려도 괜찮아’ 같은 모모의 말과 그 말에 심어진 배움들은 내 삶 곳곳에서 지침이 되었다. 지금 그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나의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았다. 평화는 쉽고 빠르게 ‘짜잔!’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 내겐 보다 깊은 여유가 생겼다. 그러면서도 담담하고 묵묵하게 계속 평화를 향하고 평화를 세우며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믿음도 길러졌다. 지금 돌아보면 모모에서의 평화교육은 나와 내 주변의 삶에 꽤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20대 중반에 농촌에 정착해 살게 됐고, 어느덧 30대 중반을 바라보게 된 최근 몇 년간 나는 내가 배워온 ‘평화/교육’과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농촌’을 연결짓고 싶은 꿈이 생겼다. 나의 역량에 비해 너무 큰 꿈일지 모르지만, 언제나 머릿속에서 나만의 언어로 그 두 세계가 만나서 정리되기를 기다리며 기대하고 있다. 이런 꿈 덕분에 평화를 위해 내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해 보다 자주, 구체적으로 떠올리곤 했다. 이 꿈은 점점 커지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교육을 들으면서 그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빈틈이라 느끼는 부분들을 채우고 싶었다.
한 살, 세 살의 두 아이를 다른 식구들에게 맡기고, 왕복 이동에만 7-8시간이 걸려 하루종일 집을 비워야 하는 이 커다란 일정을 소화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런 커다란 꿈과 계속 커져가는 의지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 심화과정을 앞두고 충격과 공포의 12.3 비상계엄 사태가 있었다. 이 시국에 ‘평화’를 이야기하자니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비장한 의지를 불태울 수 밖에 없었다.
모모에서 교육을 취소해줄 리는 없을까, 조금 기대했다. 탄핵 촉구 집회에 발가락 하나라도 보태고 싶은 심정인데, 서울까지 가서 집회에 못가고 공부를 하면 집중이 되기나 할까 싶기도 했다. 내가 사는 이 작은 촌동네에서도 45인승짜리 ‘탄핵버스’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지역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뜨거운 한 마음으로 모여 서울에 간다고 했다. 이웃들과 탄핵버스를 타는 대신 혼자 시외버스를 탔다. 심지어 집회 열기로 버스는 모두 매진되어서 나는 교육 전날 밤에 서울에 가야했다.
그래도 서울까지의 먼 길, 긴 시간이 고되긴 커녕 설렜다. 주로 ‘엄마’로 가동되던 몸과 정신을 잠시 내려놓고, ‘나 자신’을 예열시키고 가동하기에도 충분하고 알맞은 그 시간을 마음껏 누렸다. 중요한 임무를 맡기라도 한 것처럼 태세를 가다듬었다. ‘진짜 잘 배우고 올거야!’
서울은 우리 동네에서 보기 힘든 눈이 조금씩 쌓여있고, 코끝에 기분좋은 찬바람이 불었다. 손이 시려워 호호 부는 것도, 지하철과 버스에 카드를 찍는 것도, 사람이 가득한 길을 헤치듯 걷는 것도, 한 걸음 한 순간마다 모든 비일상적인 행위들이 나에겐 환기이자 배움의 시공간으로 들어서는 의식이 되었다.
교육은 대훈이 진행했다. 질문하는 연습, 잘 듣고 요약하는 연습, 요약한 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연습,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단어와 생각들을 연결해서 문장으로 만드는 연습, 그것들을 구조화해서 ‘개념 지도’로 만드는 연습들을 했다. 다양한 토론법을 익히고, 교구 활동을 시뮬레이션 해보기도 했다.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아! 모모 공부가 이랬지.’ 마치 불가능할 것 같은 미션이 무자비하게(?) 휘몰아쳤다. 예를 들면, ‘앞사람이 한 이야기에서 핵심 메시지를 발견하고 20초 안에 그것을 앞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새로운 언어로 그 의미를 전달해주세요. 그러면서 앞사람에게 인정과 환대도 함께 표현해주세요.’ 이런 종류의 낯선 미션들은 진짜 불가능해서 내가 말하면서도 뭐라고 하는 지 모르는 창피한 순간들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다행인건 창피하기 전에 또 다음 미션이 주어져서 창피할 겨를도 없다. 놀랍게도 ‘이게… 되네? 점점 더… 되네?’ 하는 순간들도 있다. ‘이것이 촉진이구나’ 싶게 나의 한계 돌파가 촉진된다.
난 여태까지의 어떤 때보다 이번 훈련에 집중이 잘 됐다. 누가 날 어떻게 평가할지 신경쓰이지 않고, 그저 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왜그랬나 생각해보면, 배움에 유용한 자세를 익히려고 꽤 오랜 시간 노력했기 때문인 것 같다. 배우면서 눈치보지 않기, 배우면서 자기검열하지 않기, 배우면서 창피하지 않기. 이 단순하지만 어려운 것들 역시 모모에서 계속해서 배우고 훈련해온 것들이다. 이것들이 어느 정도 내게 익혀졌고, 거기에다 이 기회가 더욱 간절한 처지여서 그랬던 것 같다.
평화교육 진행자되기 입문과정을 수료한 것은 2017년이었고, 그 사이 심화과정과 나는 시기가 맞지 않아서 늘 엇갈렸다. 늘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이번에 교육을 들으면서 지금이 심화과정을 듣기에 딱 좋은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과는 내가 조금 다른 단계에서 이 교육을 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평화/교육/진행 그 언저리 분야에서 무언가라도 꾸준히 배우고 꾸준히 해온 것에 나름의 성과가 느껴졌다. 그래서 혹시 나같은 사람이 있다면, 평화를 일구고픈 꿈이 있다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평화교육이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파편같은 생각들을 연결해서 지도로 만든다는 건,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우리가 계엄 이후 목격하고 있는 폭동들의 원인을 떠올릴 때, ‘윤석열! 이 비겁한 X 때문에!’, ‘극우 유튜버들이 문제야.’라는 두 생각이 있다고 하면, 그 둘을 이어주는 생각이나 근거, 동사를 발견하는 거다. 여러 조각을 많이 많이 잇고 그 관계를 발견해서 정리하면, 머릿속에 나의 생각들이 지도로 그려진다는 거였다. 이게 내가 처음 교육을 신청하면서 기대했던 ‘생각의 빈틈 채우기’에 큰 도움이 됐다.
토론법을 익히고, 교구 실습을 할 때에도 구체적인 나의 현장(지역), 나의 고민들을 연결지어 생각하니 더 재미가 있었다. 그건 내가 나의 현장, 나의 지역을 몹시 애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시 내게 간절한 질문이 있을 때 공부가 더 재미있다. 내게 끊이지 않고 간절한 질문들이 찾아와주면 좋겠다. (이번 교육에서 우리에겐 강력한 공통의 키워드가 있었다. 바로 12.3 비상계엄과 내한사태. 우린 이번 심화과정 내내 공부에 쓰일 생생한 재료들을 과분하게 공급받았다…)
그리고 배움이 알찼던 건 무엇보다 함께 배우신 동료들 덕분이다. 모모에서는 서로의 생각이 곧 배움의 재료가 되기에, 함께 배우신 동료들 덕분에 이번에도 풍성한 배움이 있었다. 다 다른 저마다의 애틋한 현장이 있는, 평화에 ‘진심’인 분들을 만난 것 자체로 감사하다. 이번 교육에서도 그렇지만,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계속되는 절망적인 나날에도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희망이니까.
1일차 교육을 마치곤 다함께 두손을 모으고 유튜브 생중계를 봤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는 순간을 평화교육 동지들과 함께했다. 아직 서로 어색해서 광장만큼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광장과 똑같이 뜨거웠다.
2일차 교육을 마치곤 모모들은 여의도로, 나는 남태령으로 갔다. 전봉준 투쟁단 1기에서 투쟁했던 남편이 ‘남태령으로 가서 힘을 전하라.’고 알려준 덕분이었다. 도착한 남태령은 생각보다 휑해서 나는 쭈뼛쭈뼛했다. 그런데 점점 시야에 사람이 가득 차더니, 뒤를 돌아볼 때마다 사람이 걷잡을 수 없이 배로 불어나고 있었다. 나도 그대로 떠날 수가 없어 막차로 차표를 바꾸고 남태령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목청껏 ‘차빼라’를 외쳤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뉴스로만 봤던 2030 응원봉을 쥔 여성, 청년들을 남태령에서 ‘실제로’ 다시 만났다. 연이어 나오는 K-POP에 얼떨떨하면서도 힘이 나서 엉거주춤 춤을 추고 더듬더듬 노래를 따라하던 우리 농민 어른들은 너무 귀여우셨다. 시민들의 입에서 “농민이 잘살아야 우리도 잘산다” 같은 말을 들은 것도 새로운 역사였다. 남태령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보았다. 농민과 시민이 다시 만난 세계. 내가 연결하고 싶었던 농촌과 평화- 그것이 만나면 이렇게 놀라운 세계가 열리겠구나! 싶었다. 시민들의 자유발언 하나 하나는 모두 보석같았고, 마치 이번 심화과정의 ‘특별 방과후 수업’ 같았다. 그래서 남태령의 그 장면이 나에겐 이번 심화과정의 뜨거운 엔딩이었다.
윤석열 탄핵 촛불과 함께한, 잊을 수 없는 심화과정이었다. 트랙터가 다시 아스팔트 도로 위에 오르지 않아도 되는. 모두 마음 속에 무지개 하나쯤 품고 사는.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우는. 그런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다음 숙제라면, 그 숙제를 위해서는 아직 동료가 더더더더더 많이 필요하다. 더더더더더 많은 분들이 모모와 만나고, 깊고 진한 서로배움의 경험을 하시길 바라면서 지금 여기 나의 응원봉인 연필로 심화과정의 후기를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