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과 ‘점령’ 사이, 시야에서 사라진 ‘존엄한 존재로서의 타자’

 

“한번 뿌리 뽑히는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영원히 뿌리를 잃게 된다.”

 

팔레스타인 시인 무리드 바르구티는 그의 책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난민이 됐다. “임시로” 거처를 찾고, “임시로” 이스라엘과 싸우며, “임시로” 주거지를 찾아 계속해서 이동했다. 바르구티는 1967년 '추방' 이후에 그들이 했던 모든 일들은 “상황이 좀 더 확실해질 때까지”하는 일시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1967년 이스라엘이 3차 중동전쟁으로 동예루살렘 지역을 점령하면서 그의 고향 '라말라'로 돌아가는 길은 막혀 버렸다.

 

오스만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령이 됐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엔 아랍인 거주자가 대다수였고, 유대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국제사회는 유대인을 위한 '고국(National Home)' 건설의 과제를 영국에게 넘겼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홀로코스트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의 수는 늘어났다. 1947년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리하고 예루살렘을 국제 공동 구역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분할안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국제사회가 국제 관리 지구로 지정한 예루살렘 서쪽을 1948년 1차 중동전쟁 중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을 통해 동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그리고 1980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는 법을 제정해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국제사회는 당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78조을 통해 이스라엘의 일방적 선언이 '무효'임을 못 박았지만, 이스라엘의 점령을 무효화하지는 못했다.

 

유대인들은 먼 옛날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역사, 나치가 자행한 끔찍한 홀로코스트 경험을 근거로 이스라엘 건국을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정당화한다. 물론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이 끔찍한 폭력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극을 겪은 이들에게 '단일한 국가'에 대한 열망은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할 터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폭력의 역사를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이 요구하는 '정착'은 팔레스타인들에겐 '점령'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서안 지구 주변으로 714km에 달하는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든 이동을 감시·통제한다. 서안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일상적인 출퇴근과 등하교를 위해 매일 아침저녁 체크포인트를 통과해야 하며, 이스라엘 군인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한밤중에 팔레스타인 주민의 집에 들이닥쳐 일방적으로 퇴거를 명령하거나, 이스라엘 정착민에게 토지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본래 그 땅에 살던 팔레스타인 집주인이 보는 앞에서 집을 부숴 버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우리 조상들의 땅이니 도로 되찾겠다”는 이스라엘인들의 강압적인 요구는 현재의 부동산 소유권 감각으로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로 그 땅을 되찾고 있다. 아니 빼앗고 있다. 땅을 빼앗는 것은 삶을 빼앗는 일이다. 한 존재의 자리(place)를 박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미국의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짊어져야 하는 짐은 “추방된(displaced) 존재, 그리하여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있게 된(misplaced) 존재로서의 짐”이라고 말했다.2014년 7월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이 이어지던 때, 이스라엘 일부 주민들이 스데롯의 언덕에 올라 팝콘을 먹으며 공습 장면을 구경하는 모습이 포착돼 세계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때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주민 170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 정부뿐 아니라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미 '비체(abject)'가 돼 버린 것이다. 나치가 유대인에게 그러했듯이.

 

지난 5월 10일 시작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무력 충돌은 11일간 지속됐고, 21일 휴전 합의에 도달했다. 11일 동안 260명이 사망했다. 그중 248명이 팔레스타인 사람이고 12명이 이스라엘 사람으로 알려졌다. 팔레스타인 사망자 중 60명은 어린이였다. 숫자로 나열된 무력 충돌의 결과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로 다가오는가? “260명이 사망했다”는 문장만으로는 결코 담아내지 못할 처참한 고통과 애통함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싫어하고 끔찍해했던 가해자의 모습을 지금 스스로가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과연 알까? 긴 시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행위들은 또 다른 '민족 청소'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사실이 있다. 이스라엘인 전체를 단일한 가해자로 규정하는 것 역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인이라는 정체성 역시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 앞에서의 당혹스러움을 인정할 때, '피해의 역사'가 또 다른 '가해의 역사'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추동을 거슬러 새로운 가능성을 목격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BTS)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온 'BtS(Breaking the Silence)'라는 단체가 있다. '침묵을 깬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 단체는 이스라엘 방위군 출신 제대군인들로 이루어진 비정부기구다. 자신들이 군인 신분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행했던 끔찍한 억압·폭력을 반성하고,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인권유린과 탄압, 조직적인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양심선언에 동참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을 극단적인 반정부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극우 세력들은 이들을 반민족단체로 규정하고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도 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국가·민족이라는 허울에 포획되지 않고 '존엄한 존재로서의 타자'를 마주볼 힘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인 친구 '샤론'이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무력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공습에 반대하는 집회 행렬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녀의 가족들 모두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는 이스라엘 정부군과 하마스 사이의 무력 충돌이 격렬하던 지난 17일 소셜미디어에 이런 글을 올렸다.

 

“매일 아침 Lev와 Shemesh에게 그날 작별 인사를 하면서 '너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니?'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저는, '다른 사람들은 무엇으로 만들어 졌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별'이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이 작은 의례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우리 아이들이 과연 이해할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이들이 그렇게 해 주기를 매우 바랍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very morning when I say goodbye to Lev and Shemesh for the day, I say 'What are you made out of?' and they say, 'stars.' Then I say, 'What is everyone else made of?' and they answer, 'stars.' I'm not sure that they understand what I am trying to convey with this little ritual, but I very much hope that they will. I say it as a reminder that we are all one. We are all made of stars.)”

 

'우리'라는 단어는 자주 우리를 '그들'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고, 단일함을 표상하는 데 쓰이기 때문에 결코 내가 선호하는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샤론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의 '우리'는 충분히 '우리'일 수 있다. 출신 배경도, 민족도, 인종도, 국가도, 종교도, 그 무엇으로도 '존엄한 존재로서의 타자'를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며, 모든 이방인이 곧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늦지 않게 알아차리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이 우주에 뿌리내린 식물들, 하나하나 자기의 뿌리로 유영하는 고유한 별들이라는 사실을.

 

문아영/피스모모 대표

2021.5.25.  ⓒ 뉴스앤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