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모모와의 처음 만난 건 2019년, 청소년집시위크에서였다. 그 이후 입문과정에 참여하기까지 4년이라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4년 동안, 나는 3년간 활동했던 청소년 인문학교육단체와 이별하고, 대학과도 이별하며 앞으로 어떻게 한 사람의 역할과 책임을 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해왔다.
대부분의 전공수업에서 전쟁사진과 걸프전에서 미국이 보여준 이미지 전쟁(적군을 마주하지 않고 마치 게임처럼 모니터를 주시하는 모습으로 전쟁하는)에 대한 내용을 학습하며, 전쟁과 전쟁사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관심이 직접적 폭력(전쟁)까지도 확장되어 왔다. 다른 사람들이 경험했듯, 그 전쟁에 대한 영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체감하게 되기도 했다. 또한, 참여자나 학생이 아니라 주최자나 주최의 일원으로 역할이 전환되는 과정을 겪고 있어, 이때 모모의 평화교육진행자되기 과정을 들으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신청하게 되었다.
호기롭게 신청한 것과 다르게 모모와 만날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걱정되었다. 나는 지금 아무 곳에도 속해있지 않고, 활동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채용 면접을 보고 올 때마다 바닥을 치는 자존감으로 인해, 새로운 사람들과 잘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실제로 나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환대의 분위기에서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걱정과 이질감은 점심을 먹을 때에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첫 시간에는 환대에 대해 계속 경험하고 '아하!'하는 순간들을 경험했는데, 환대에도 다양한 경험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환대를 잘하고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룹으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계속되며,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엔 다들 체력이 방전되었다. 이 시간 동안 서로의 온 힘을 다했기 때문일까, 바닥나버린 체력을 나누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실제로 두 번째 만남부터는 낯선 누군가가 아니라 이미 서로의 환대를 경험한, 이 프로그램을 채우고 있는 동료로 인지하고 서로 안부를 묻는 광경이 만들어졌다.
청소년집시위크와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는, 활동에서는 참여자로서 이 활동에 흠뻑 참여하지만, 그 활동이 끝난 뒤에는 계속 진행자로서 생각해봐야 할 점과 주의할 점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미 다른 현장에서 교육자나 진행자로 활동하는 분들의 경험을 계속해서 공유받았다. 점심시간까지 계속되는 질문과 대화로 매 회차 녹초가 되는 상황을 경험했다. 또한, 프로그램 마지막에는 항상 4-5명의 배움동무와 함께 각자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며 배움을 알차게 채울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지역의 교사들을 만났을 때 일본과 한국의 교사만 자신의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자리의 오와 열을 맞춘다는 대훈의 말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교실의 모습이 현재 교실 모습과 닮아있다는 말, 전쟁의 영향을 받은 풍경이 100년이 가까이 되어도 변화하지 않았다는 말도 나에게 큰 바늘로 다가왔다. 그동안 내가 피부로 느끼고, 중점적으로 관심 두고 있는 구조적 폭력의 뿌리와 전쟁의 연결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일상에서 평화를 바라는 것과, 과거로부터 계속되는 폭력을 해결하거나 회복하는 것이 이어질 수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모모와 다시 만나면서 그동안 냉소에 젖어 잊고 있었던 감각을 다시 깨우는 경험을 했고, 평화에 대해서, 교육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했다. 특히 ‘안전한’ 이라는 키워드는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들었다. ‘안전한’ 뒤에 이어지는 명사에 이질감이 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