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리틀
2020 온라인 모모평화대학 초봄학기의 참여자인 “리틀”에서 적어주신 소중한 후기를 나눕니다.
외부인
우리가 여러 개 다른 다양한 정체성이 겹겹 쌓여 있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구성할 때 자기 본질적인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지 않는다. 나는 백인 남자 서양인으로써 비교적으로 특권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국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나는 애국주의에 대해 거부감이 많다. 나는 국수주의를 싫어한다. 이미 거부했고 반발했다.
애국주의는 기득권층들이 쓰는 꼼수뿐이다. 해외에 나간 후에 자꾸 더 좋은 의미를 샅샅 찾아봤는데 결론적으로 싫다. 국가주의보다 국제주의, 민족주의가 아닌 다문화주의는 나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내가 어렸을 때 극우파 인종차별주의 단체들이 국기를 남용하는 사례를 자주 봤기 때문에 애국주의에 대한 위험성도 느꼈다. 아마 교육 참여자 중에 대부분은 애국주의를 비판적으로 접근할 것 같다. 국가중심적 안보의식이 폭력을 초래했다는 점을 느꼈을 것 같다. 그리고 국제주의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공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 한국에서, 최종적으로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한국인이다 아닐까?
나는 한계에 부딪쳤다.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힘을 모이기 위해, 충분할까? 나는 그 사회의 구성원일까?
“우리”를 낯설게 본다. 우리는 얼마나 힘이 센 단어인지 들을 때 마다 느낀다. 우리집, 우리 엄마, 우리 팀, 우리 프로젝트, 우리 도시, 우리 사회라고 들을 때까지 포용하고 아주 따뜻하다.
“우리는 같은 거다”, “우리는 어울리다”, “우리는 함께 있는 것이 맞다.” 그럼 그 따스함만큼, 즉 관용은 그 정도 있을 수 있다면, '우리'에 포함되지 못할 때는 뭐가 되는 것인가? 거기에 포함되지 못할 때, 한 순간에 “잠깐만! 기다려” 부르고 싶다. 위축됐다는 것을 보여도 되는가?
그 “우리”에 배제되는데 사실 다른 특권과 관력은 상대적으로 많고 그리고 선택해서 이 상황에 왔는데, 그럼 이때는 위축 그 자체를 되어도 되는 건가? 탈분단 렌즈는 이분법을 부인하여 벗어나기 위해 이용하는데 역설적으로 이 렌즈를 활용할 때, ‘우리’를 성찰하여 ‘우리’가 더 강해지지 않는가?
갈 길이 멀더라도, 동기 찾기
분단으로 인한 폭력을 찾고 있었다. 분석해서 스며드는 것을 여기 저기 알아냈다.
다음 주제는 일상 안보이었다. 한국에서 나를 잘 지킬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생각해 봤지만 잘 모르겠다. 문제 제기는 좋은데 한국 시민사회에서 뭐가 좀 다이내믹한 느낌이 있다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한 순간 이 대화는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민주화부터 박근혜 탄핵까지 여러 다른 투쟁에서 승리의 맛봤다고 강조하고 싶었다. 아직 갈 길이 멀더라도 이긴 적이 있긴 있다.
나는 아프간 참전 반대 운동부터 여러 다른 운동을 통해 세계 금융위기 반신자유주의 운동까지, 다 열심히 참여했는데도 다시 생각해보니까 뜻대로 된 것이 없다. 분단으로 인한 폭력, 일상 안보에 대한 분석과 성찰도 그 교육 진행 자체는 참 대단한 성과다. 갈 길이 멀더라도 항상 염두에 두고 때때로 칭찬을 받기에 알맞은 것을 칭찬한다.
직접행동과 공권력
영국 트라이던트 파괴하는 직접행동에 대해서 읽었을 때 뭐가 씁쓸했다. 그 여성 운동가를 존경한다. 대학교 다녔을 때 나의 동기 몇 명도 정기적으로 파스레인 스코틀랜드에 가서 군기지 앞에서 시위를 했다. 그 분도 존경한다. 단, 좌파 운동가로써, 훌리건 문제가 있었던 축구팀의 응원자로써 공권력의 남용을 자주 봤다. ‘좌파 쓰레기’ 또는 ‘노동자 쓰레기’ 칭호는 다르지만 결과는 똑같이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마무리된다. 개인적으로, 난 백인 남자로서, 끔찍한 결과를 피할 수 있었다. 나보다 권력이 낮은 사람들이 많다. 권력이 없는 자들이 직접행동에 참여할 선택권이 없다. 사회적 약자들이 운동에 참여할 여유가 없다. 어떻게 더 포용적인 활동을 만들 수 있을까?
수업을 듣는다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머릿속이 가득찼다
머리속이 잘 정리됐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과정은 반복한다. 답답하지? 가득찰 때, 하얘질 때. 그래도 참 좋다, 처음 복잡해질 때 마다 그 순간, 정리될 때 마다 그 순간, 머리가 돌아가고 있다. 이게 성찰인가? 그렇다. 새로움을 깨닫고, 이유들을 찾고, 세상의 여러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더 생산적인 해석을 찾는다. 의미와 이해는 우리가 구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