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 낯섦
2023년 마지막 달, 피스모모의 새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나에게 익숙했으나 지금은 낯선 것이 되어 버린 기억을 찾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의 골목길과 흡사한 비탈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날다람쥐처럼 오르던 익숙함이 떠올라 호기롭게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평지의 편안함에 익숙해져 물렁해진 다리는 이내 걸음을 붙잡았다. 눈앞의 익숙한 길을 오르지 못하는 내 모습이 낯설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무거운 다리를 끌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도착한 피스모모의 새 보금자리에는 낯선 얼굴들이 가득했다. 낯선 얼굴들 사이로 두리번두리번 아는 얼굴을 찾으며 익숙함의 편안함을 찾았다. 여전히 나에게 낯섦의 불편함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숨을 고르며 동그란 대형으로 자리를 잡자 시작된 1대1, 환대의 대화. 경계심이 많은 나에게 지난 입문과정에서 가장 긴장되었던 순간은 바로 두 사람이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이었다. 그동안 많은 교육에 참여했지만, 늘 다른 교육생들의 뒷모습을 보며 1대 다수로 진행되는 교육에 익숙해 있던 터라 낯선 이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입문과정을 지나며 나의 말에 귀 기울이며 존중의 모습을 보여주는 참여자분들의 반응을 보며 경계심이 점차 허물어져 갔고, 덕분에 심화과정에서는 낯선 분들과 조금은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대화의 순간이 주는 편안함은 잠시였다. 나는 평화교육 참여자가 아닌 진행자가 되기 위한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심화과정이라는 커리큘럼과 시간의 압박 속에 과정이 진행될수록 긴장감이 높아갔고 당황스러움에 안절부절못했다. 당시에는 시간의 압박과 집중을 요구하는 주제와 과제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정이 끝난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긴장하게 하고 당황하게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심화과정을 위한 준비가 덜 되어있었다. 하지만 서툴고 부족함을 편안히 드러내지 못했고 연습과정임에도 진행자라는 위치가 주어지는 순간 옳은 것을 찾아야 하고 잘 해내야 한다는 내 안의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당황하고 긴장했다. 하지만 ‘뭐든지 OK’라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신 다른 분들의 격려와 지지 덕분에 점차 긴장이 줄어들고 편안하게 내가 아닌 타인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정답이 아니라 메시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어진 ‘명료화하기’와 ‘개념지도 만들기’ 연습은 엄청난 집중과 에너지가 필요했지만 강렬한 배움의 경험이었고 깨달음을 통해 쾌감을 얻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배움의 경험을 몸에 새긴 2일 동안의 심화과정을 마친 지금 나에게 깊게 남아있는 배움의 내용은 ‘정체성과 폭력’, 그리고 ‘우리에 한정되지 않는 모두의 평화’이다. 개인의 내면에 공존하는 다양성과 관계 속의 교차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 축소하려는 시도가 계속될 때, 인간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폭력은 정당화된다는 아마르티아 센의 ‘정체성과 폭력’에 대한 내용은 깊은 공감과 더불어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교육현장에서 젠더폭력을 이야기하고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눈앞 책장에 꽂아 두고 있지만 혹여나 ‘모두’에 집중하기보다 또 다른 ‘우리’를 찾고 있지는 않았는지 성찰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찾는 ‘모두’의 평화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고, ‘평화는 불편함을 포함한 평온’이라는 아영의 말이 다가왔다. 지금까지 나의 평화 개념지도에서 낯섦과 다름이 주는 불편함은 회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번 심화과정은 나에게 익숙한 ‘우리’가 아니라 ‘모두’를 설정할 때 따라오는 낯섦의 불편함을 마주하고 그에 따른 나 자신의 태도 변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이러한 고민을 통해 얼마 전 진행한 교육의 현장에서 안전한 배움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작은 변화를 용기 내어 시도할 수 있었다. 기대한 방향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참여 학생들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나의 노력을 존중해 주었고 사전에 걱정했던 우려상황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편안한 모습으로 소통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보며 안절부절 불안해하는 참관 선생님 덕분에 오히려 내 안의 학생들을 통제하고픈 욕구가 사그라들며 편안해지는 흥미로운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동시에 다양한 질문을 하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좋은 질문에 대한 고민과 연구의 필요성을 또다시 절실히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피스모모의 평화교육 진행자되기 입문과정과 심화과정을 지나오며 얻은 배움의 두께만큼 고민의 무게도 늘어간다. 나의 고민과 성찰과 노력이 모두의 평화를 이루는 한 톨이 될 수 있도록 계속 경험을 나누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바란다. 피스모모로 향하는 비탈길이 선물하는 다리의 낯선 뻐근함이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