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참여하게 되었는지
어떤 말로 이 글을 시작할까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피스큐레이션 웹자보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철원을 오랜만에 다시 가보고 싶다’ 였거든요. 그게 그때 당시 피스큐레이션 프로그램을 신청한 가장 큰 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철원을 가고는 싶은데, 그냥 가면 뻔하니까 덜 뻔하게 가보자, 모모에서 가는 거라면 새롭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활동가로서의 삶에서 조금 떨어진, 그저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저에게 매주 토요일 6시간씩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분명 적지 않은 부담이었습니다. 사실, 단지 철원을 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는 왜 이걸 꼭 하고 싶은지 스스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2. <피스 큐레이션>, 4회차의 과정들
첫날, 자기소개 시간 이후 피스 큐레이션에 대한 기대치와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기여치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실 무언가를 하기 전, 각자가 기대하는 바가 있겠지만 직접 꺼내어 말하거나 글로 적어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얼 기대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더 더욱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이미 차려진 프로그램을 수동적으로 ‘수강’하는 역할에 더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기대치와 기여치를 생각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능동적으로 무언갈 함께 만드는 역할로 시각이 전환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눈 기대치와 기여치)
모드 전환 이후, 모모는 저에게 엄청난 질문 보따리들을 안겨주기 시작합니다.
- 지금 우리 사회가 분단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지?
- 어떤 부분을 보여주고, 어떤 부분을 가리고 있지?
- 누구의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 어떤 것이 변화가 필요하지?
- 그 변화는 왜 필요하지?
- 어떻게 변화해야 하지? 등등
이런 질문들을 때로는 활동을 통해 몸으로 느끼고, 때로는 직접 글자로 접하며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그려내고 있는 전쟁/분단/안보를 낯설게 바라보고, 그 대안적인 방법을 구체적으로 구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려지는 전쟁은 ‘평화’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있는 경우까지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죽음을 ‘계급순’으로 나열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폭력을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질문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서사에서 가려진 존재들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뭉뚱그려진 범주가 아닌 학도병, 민간인, 외국인, 여성, 어린이, 야생동물/식물 등 다양한 행위자로 구체화 되고 선명해졌습니다.
(2회차에서 나에게 남긴 키워드)
대안적 방식으로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에 대한 구상은 저에겐 굉장히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말하려는 바와 수단이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서술해야 할 서사 속 행위자뿐만이 아니라 서사를 서술하는 행위자도 여럿이었습니다. 심지어 저라는 한 사람 안에서도 중점적으로 하고 싶은 질문이 순간순간 바뀌기도 했습니다. 2회차는 이렇게 스스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3회차의 철원 답사는 저의 고민이 하나하나 풀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첫 장소였던 소이산에서 누군가의 설명이나 발표는 따로 없었습니다. 단지 길 안내만 있었을 뿐, 각자 자유롭게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삼삼오오 모여 감상을 나누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이 따로 없다는 점이 오히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했습니다.
노동당사에서 참여자들이 진행한 큐레이션은 전쟁 당시에서 벗어난, 과거 누군가의 삶 속에 존재했던 노동당사와 먼 훗날 변화할 노동당사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습니다. 마침 패션쇼 촬영이 진행되고 있던 현장의 분위기는 더 다양한 상상을 하기에 좋은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백마고지에서는 한국인-성인-여성이 아닌 다른 시각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외국인의 시각에서 국가가 서술하는 전쟁은 어떤 느낌인지, 아이의 시각에서, 남성의 시각에서, 종교인의 시각에서는 어떤 느낌인지 낯설게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명확한 주제를 너무 ‘잘’ 전달하고 싶었고, 그게 제 고민을 아우르는 하나의 맥이었나 싶었습니다.
(분단과 전쟁에 대한 고민만 하기엔 너무 아름다웠던 소이산)
(패션쇼를 촬영하고 있던 노동당사)
일종의 깨달음을 얻은 채로 맞이한 4회차도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 ‘잘’하고 싶은 것은 여전했고, 그러다 보니 ‘완벽한 결과물’을 내고 싶다는 욕심은 오히려 제 눈을 가렸습니다. 4회차 대부분의 시간은 1~2회차에 이은 ‘평화기행 기획안 작성’ 이었거든요. 이 전의 모모에서 참여했던 프로그램에 비해 꽤나 실무적인 배움 과정이었습니다.
참여 대상과 답사 지역, 구체적인 장소를 정하고 각 장소에서의 활동, 그에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한 타임 테이블, 준비물까지 직접 기획해보는 작업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너무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모모가 그러하듯, 기획안은 함께 만드는 것이었고, 제가 부족한 부분은 다른 팀원들과 함께 으쌰으쌰 꾸려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3. 기억에 남는
3회차 답사에서 백마고지 전적지를 방문했을 때 5살 즈음으로 보이는 아이와 그의 아빠가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습니다. 국군이 백마고지를 탈환한 후 만세를 외치는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빠, 이 사람들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응! 우리가 적군이랑 싸워서 이겼으니까!”
“왜 싸워?”
“우리나라를 지켜야 하니까!”
“근데 왜 싸워?”
…
“(아이가 양손을 벌리며)그럼 이렇게 한 거야?”
“응! 우리가 열 번 이긴 거야!”
4회차의 <피스 큐레이션> 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 대화였습니다. 1~2회차의 과정이 없었다면, 이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양한 존재와 관점을 드러내는, 지속가능한 평화를 만들어가는 대안적 서사로의 피스 큐레이션은 이 대화 속의 아이처럼 끊임없이 질문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4. 감사한 분들
(마지막 날 서로 나눈 키워드)
<피스 큐레이션> 과정에 참여하며 감사했던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번 큐레이션 과정은 매번 깨달음과 반성의 과정들이었습니다.
노동당사에서의 어릴 적 기억을 공유해주신 윤슬,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시각을 벗어날 기회를 주신 파니, 한국전쟁의 가려진 역사를 알게 해주신 성우, 노근리 학살사건 현장을 설명해주신 그냥, 논의가 막힐 때 매끄럽게 진행을 연결해주신 시소, 언제나 반갑게 인사 먼저 나눠주신 가지, 기획안 회의 때마다 꼼꼼하게 기록해주신 돌멩, 종교성이라는 새로운 해석 관점을 일깨워주신 귤귤 등 모든 배움동료분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의 시야를 확장 시킬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배움 동료들이 만날 자리를 마련해주신 피스모모 진행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번 과정에서 기획한 기행들을 함께할 날을 기다리며
2021년 10월 어느 날 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