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모모가 꿈꾸는 "평화커먼즈를 실현하는 시민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요?어떤 과정을 통해 평화커먼즈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질문에 답하기 위한 한 가지 시도로서, 피스모모의 평화교육진행자 그룹의 공부모임이 운영되고 있습니다.커머닝(commoning, 커먼즈를 가꾸는 구성원의 기여와 그 일련의 과정들)으로서 공부하고 사유하는, '존재하기 위해 변화'하는 서로배움 공동체의 소식을 나누어요😊 언제: 2023년 11월 24일(금) 저녁 7시 20분 - 9시 30분 어디에서: 피스모모 사무실 누가: 서로서로, 그린하, 영철, 사다리, 아싸, 가지 배움자료 ① 정영신(2016) “엘리너 오스트롬의 자원관리론을 넘어서-커먼즈에 대한 정치생태학적 접근을 위하여” (발제: 사다리) ② 피스모모(2020) “Peace as Commons” 기획 영상 (발제: 아싸) 복합위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언어를 점검했던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모임에서는 피스모모의 미션과도 연결된 평화커먼즈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명칭조차 생소했던 커먼즈에 대해 알아가며 토론할수록, 커먼즈 관점에서 평화/교육 활동과 기존의 일상을 재해석하는 재미가 더해지는 모임이었어요. 알고보니 수많은 형태로 존재해왔고, 성공하거나 실패해왔던 커먼즈를 통해 사유하는 힘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매 순간 평화에 가까운 판단과 선택,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수많은 행위자의 출현, 그를 촉진하는 시민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피스모모가 "Peace as Commons(평화는 모두의 것)"이라는 슬로건을 제안한 이유를 새롭게 보게 되기도 했고요. 주로 수치화, 계량화되고, 자본에 의해 평가되는 가치를 넘어서는 가치와 의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어떤 조건에서 성공적으로 발현되는가 등 쉴 새 없는 토론이 이어지는 모임이었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현장에서의 발언 일부를 아래에 나눕니다. 저희가 OECD2030이랑 유네스코 2050에 대한 내용을 공부했잖아요. 그 중 교육을 공동재로서 정의하자는 제안도 담겨있는데, 저희가 당시 그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며 토론했는지 생각이 뒤늦게 들더라고요. 공교육은 근대국가 형성과 함께 발전했고, 그 과정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습득한다는 의의도 있지만 폭력성을 담고 있기도 하잖아요. 특히 한국 맥락에서 공교육은 북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고요. 그러한 역사와 영향에 대해서, 그리고 대놓고 반공교육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배타적인 역할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성찰할 것인가의 고민도 커졌어요. 힘을 받기 어려운 환경이지만요. 더불어 우리가 만나려는 수많은 행위자들이 공교육을 중심으로 학습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교육이라는 것을 커먼즈로서, 공동체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려면, 나아가 공교육 체계에서 벗어나있거나 벗어난 이후의 시기에도 커머너로서의 사고와 역할이 이어질 수 있으려면 어떤 방식의 개입이 필요할까, 우리의 지금 활동은 어떤 지점에 있는가 등 고민이 생겨났어요. 학교와 연결해서 생각나는데요. 입시 중심 제도의 영향이 강한 학교에서는, 학생 한 명 한 명이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고, 무언가 할 수 있게 되는 큰 사적 영역의 자원이잖아요. 그래서 그걸 공유하지 않게 되고, 필기한 노트 안 보여주고, 내 준비물 안 빌려주고, 내 영역에 대한 생각이 커지는 것 같아요. 반면 저희가 지향하는 교육에서는 동그랗게 앉아서 모두가 동등하게 경험하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전하게 나누고, 진행자는 그 생각을 연결해서 상승시키고, 그게 공동의 소중한 배움이 되는 순간을 많이 경험하잖아요. 이게 커먼즈가 아닐까 싶더라구요. 교육 현장에서도 이미 서로배움을 통해 커머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과정을 경험한 분들, 서로 이야기 나누고 서로 배운 분들은 가치를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공동체 내의 규칙이나 문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되게 좋은 커먼즈인 것 같아요. 제가 아는 특수교육 커뮤니티 사이트, 플랫폼이 있어요. 가입과 인증 절차가 굉장히 까다롭긴 한데, 일단 접속하면 그 안에서 굉장히 구체적으로 필요한 자료들이 공유돼요. 저는 처음에는 되게 놀라웠거든요, 이걸 그냥 무료로 배포해도 되나 싶어서요. 예전의 저는 그냥 제 학급을 잘 운영하고 싶은 욕심만 있었는데, 그 욕심이 무너지더라고요. 선생님들이 서로서로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료를 올리고, 필요한 것을 검색하면 많이 공유되어 있고, 활용하면서 도움을 받아요. 그러면 제 안에 부채감이 생겨요. 긍정적인 의미에서요. 지금은 자료 공유를 넘어서 학교에서 경험하는 불합리한 일에 대해서 토론하는 공론장 역할을 하는 활성화된 사이트인데요. 커먼즈를 공부하면서 제가 몰랐지만 이미 경험하고 참여하고 있던 예시가 있더라구요. 가치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가치가 존재한다,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돼서 좋았어요. 사람들이 내 것을 상대에게 줘서 아깝지 않고, 공유하면서 얻게 되는 모두의 이익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되는 경험이 소중한 것 같아요. 이게 커먼즈의 힘이겠다 싶어요. 교실에서 생활할 때 몇 명은 교실 쓸기, 닦기, 몇 명은 복도 청소, 몇 명은 화장실 청소 이렇게 역할 분담을 하잖아요. 물론 자발적으로 논의하거나 결정한 것은 아닌 경우가 많지만,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우리가 같이 사용하고 있는 공간을 돌볼 책임을 분담하는 거잖아요.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그 역할을 했던 때가 있고, 진짜 하기 싫었던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왜 그런가 돌아보면, 전자는 누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고, 제가 어떤 역할을 했을 때 그러한 돌봄과 성과에 대한 인정과 감사 표현이 있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선생님에 의해서든, 주변 친구들에 의해서든요. 이 경험을 돌아보면서, 공동체 구성원에게 특정 책임을 부과하고 그 역할을 나눈다고 할 때, 그것이 공동체의 자산을 확장하는 커머닝으로서 인식하게 하고, 기꺼이 참여하게 만들 장치들이 세심하게 덧붙여지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전문적 언어/용어를 사용하는 행동이 경계를 긋는 의미를 가진다는 말을 들었어요. 예를 들어 전문직종에 있는 사람들이 쉽게 설명하지 않고 전문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만드는 경계요. 경계는 그 사람에게 자본이 되고 권력이 되는 거죠. 우리가 교육과 커먼즈를 같이 사유한다고 할 때, 저는 우리가 이론과 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 누굴 만나더라도 더 쉽고 소통 가능한 언어로 바꿔 말하는 것도 꼭 필요한 커머닝이라고 생각해요. 초등학생 참여자를 만났을 때, 함께 이해할 수 있는 언어여야 소통이 가능하고, 수평적으로 관계 맺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처럼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커먼즈와 관련된 유무형의 가치를 찾아내고, 드러내고, 의미부여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본의 방식과는 다르게 가치를 창출하는 일인 것 같고, 지난 공부모임에서 저희가 부정 언어 말고 긍정형, 생성형 언어를 만들고 사용하자는 제안 나누었던 것과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평화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가분들이 현장에서 많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OO반대, OO폐지, OO중단하라" 가 많아요. 개별 사안에 따라 엄정하게 대응해야 하는 일이 물론 있는데, 의도하지 않게 해당 이슈의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의 진입을 막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개별 사안의 시급성을 강조하다보니, 특정 이슈를 반대함으로써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회가 무엇인가 나누고, 기존에 없었거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더해가는 방식의 메시지 생산에는 실패하는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방식으로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가치 창출에 대한 지금의 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영신 선생님 중, 마을 구성원이 함께 가진 추억 역시 커먼즈라는 이야기가 새로웠고 기억에 남아요. 어떤 유형의 자산 정도라고 생각했던 커먼즈의 범위를 확 넓히는 계기가 됐어요. 더불어 마을의 추억을 왜 지키는지, 이유에 대해 성찰할 때 단지 자산의 문제나 경제적 기준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마을의 공동의 기억이라고 하는 게 되게 중요한 커먼즈잖아요. 반면 외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전의 논의에서 비추어 볼 때, 기억이 되게 큰 벽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적절한 견제-유지를 위한 특정한 선이 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우리' 너머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우리가 어떤 일을 진행하려고 할 때 진전을 더디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어떤 정답이나 결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는 계속 긴장 속에 있는 결정의 연속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의 연장선에서, 강정에 살고 있는 저의 현재를 성찰하게 됐어요. 제 주변에는 현장에 대한 뜨거움이 많은 사람도 있지만, 저는 현장에 대한 뜨거움은 크지 않은 편이에요. 깃발 드는 것도 망설이고, 같이 걷다 오곤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머물며 백배를 하고, 인간띠를 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행동처럼, 구럼비라는 커먼즈의 상실을 기억하는 꾸준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강정에 정착한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머물며 행동하고 계속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 구럼비 또는 투쟁의 기억이라는 커먼즈를 지속적으로 가꾸고 전해준 사람들 덕분에 그 커먼즈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또 그 움직임은, 강정에 새로운 사람들이 강정평화대학 또는 피스파인더 등의 이름으로 결합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힘이 되기도 하죠.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결국 강정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작은 모임들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참 신기하고, 이게 커머닝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