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모모가 꿈꾸는 "평화커먼즈를 실현하는 시민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요?어떤 과정을 통해 평화커먼즈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질문에 답하기 위한 한 가지 시도로서, 피스모모는 평화교육진행자 그룹과 역량강화 공부모임을 운영합니다.커머닝(commoning, 커먼즈를 가꾸는 구성원의 기여와 그 일련의 과정들)으로서 공부하고 사유하는, '존재하기 위해 변화'하는 서로배움 공동체의 소식을 나누어요😊 언제: 2023년 5월 25일(목) 7시-9시 30분 어디에서: 피스모모 사무실 누가: 가지, 사다리, 영철 배움자료 ① 마리아 미즈 저, 최재인 역(2014).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발제: 영철) ② 모임 참여 전 공유한 모두의 글쓰기 "현상보다는 조건이 필연적이다." 지난 모임과 이번 모임을 연결하는 문장이에요. 어떤 사람이 폭력적으로 보일 때(현상), 그 사람이 사회에서 여성/남성으로 또는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오며 만나게 되는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의 기반이 되는 구조와 맥락들(조건)을 고려해서 현상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당면한 폭력을 얼버무리지 않으면서도, 책임을 개인화하기보다는 조건을 어떻게 바꿔볼 수 있을지의 질문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를 위해 '조건'이라고 불리우는 성차별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제,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통해 마리아 미즈는 여성운동의 의의와 성과를 조망하며, 문화적/교육적 차원(개인의 소양과 역량 강화)으로 달성되기 어려운 한계에 주목해요. 여성이 경험하는 다양한 착취-억압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라는 특수한 조건/체제와 연결하여 인식하고 바꿔낼 것을 짚어내는데요. 나아가 여성의 억압과 착취가 민중에 대한 다른 범주의 억압/착취, 그리고 자연에 대한 억압/착취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새롭게 분석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어요. 그를 위해 세 가지 방향성을 소개하지요.① 자본주의가 실제로 무엇이고,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 혹은 가부장제가 자본축적과정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② 식민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 (식민지의 조건이 중심부에도 나타나게 되면서, 그리고 여성이 많은 영향을 받게 되면서, 노동의 국제적 분업을 통해 이루어졌던 제3세계-제1세계 여성의 구조적 분리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③ 페미니스트 비전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여성해방을 위한 현실적 전제가 무엇인지 새로운 논의가 필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포함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창출한 모든 생산관계를 포괄할 수 있어야만, 여성과 자연, 다른 국민이 개발과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착취당하지 않는 사회를 전망할 수 있으므로) 물론 이 방법들은, 세계적 차원의 자본축적 시스템이 착취와 비가시화-식민지화-여성화에 기대고 있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어요. 이후 충분한 사례와 논거를 통해 규명하고 있지요. 근대국가 형성 이후 수많은 전쟁들이 군산복합체, 그리고 그와 결탁한 정치세력에 의해 추동되고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 그를 가능하게 하는 군사주의와 성차별주의의 연계를 떠올리며 이해해보게 되었어요. (군수산업 뿐 아니라 '여성화'되는 산업과 생산관계의 예시는 더욱 많겠지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물질적 생산관계 자체가 성차별적, 여성억압적이라는 말은 언뜻 과격하게 들리기도 해요. 그러나 "가부장제의 평화가 여성에게는 전쟁이다."는 문장이 함축하고 있듯,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환경과 조건'을 항상 필요로 했다는 점을 꼬집으며, 노동의 성별 구분과 국제적 구분의 상호작용을 밝히는 이야기를 따라가면 고개가 끄덕여지지요. 어쩌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온 걸까요? 남성 지배-성적 권력 정치에 따라 나타나는 보편적인 징후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마리아 미즈는 환원론을 경계할 것을 제안해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와 본질적으로 얽혀있는, 매우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으로 해석하자는 말인데요. 그를 위해 성별노동분업의 기원을 논의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에요.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해 경험하는 생산성, 그리고 자연과 맺는 대상-관계(채집자로서의 역할)를 살펴보았을 때, 여성은 처음부터 '사회적 생산'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데요. 자신 뿐 아니라 아이, 그리고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남성)을 위해 음식을 제공함으로써 첫 번째 식량 공급자가 되었다는 점 때문이에요. 남성의 산발적인 사냥은 여성이 매일의 생계를 생산하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서 기인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지요. 흔히 알려진 사실은 이와 달라서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손과 머리'가 주로 노동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사냥꾼-남성이 최초의 도구 발명가이자 식량 공급자로서 여성-어린이의 보호자라는 인식이 더 지배적이니까요. 이는 남성-사냥꾼 모델에 기초한 인류 진화 패러다임이 과학적 연구의 기초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해요. 사냥에서 허탕 칠 가능성이 높아 생산성을 여성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던 '남성 사이의 긴밀한 유대의 규율'이 존재했고,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여성 생산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우월해보이는 특정한 유형의 생산성을 개발한 것이 남성-사냥꾼 모델의 기초예요. 몸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으니 도구를 통해서 생산성을 개발하고자 했겠지요. 여성의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를 살펴보면, 생계를 위한 생산이 주를 차지해요. 땅을 파는 막대기, 호미와, 바구니, 항아리 등의 보관용기가 주된 도구이고, 이는 계속 생산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반면 사냥을 위한 도구는 다른 생산적인 활동에 사용되기 어려려워요. 동물을 죽이는 것이 사회의 한 부분, 주로 남성의 전문분야가 되었는데, 도구가 사람도 죽일 수있다는 사실에 그 중요성이 있어요. 사냥 도구(무기)가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사회적 관계와 남성 생산성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소개해요. 무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관계는 기본적으로 약탈적이며 착취적이지요. 무기를 통한 자연에 대한 대상-관계는 협력이 아니라 지배관계니까요. 마리아 미즈는 무기 독점에 기초한 남성의 약탈적인 생산 양식은 주로 여성으로 이루어진 다른 생산 경제들이 존재하고, 이들을 공격할 수 있을 때에만 ‘생산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를 '비생산적 생산'이라고 규정해요. 이러한 가부장적인 약탈적 전유 양식은 ‘비폭력적인’ 생산양식으로 대치되었을 때에도 폐지되지 않고, 변형되어 다시 등장하고 있기도 해요. 비생산자가 생산자, 생산수단, 생산품을 약탈하고 폭력적으로 취하는, 불균형하고 착취적인 관계와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건데요. 일단 불균형한 성별노동분업이 폭력수단을 통해 수립되면, 가부장적 가족, 국가 제도와 이데올로기 체제 등을 통해 유지하고, 종교, 법, 의학은 여성을 자연의 일부로 규정하여 힘을 더해주었다고 비판해요. 자본주의는 인간 생산 능력에 대한 이전의 ‘야만적’ 통제 형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강화하고 일반화시킨 것이라고 정리하지요. 요약하자면, 다양한 형태의 불균형하고 서열적인 노동분업은 역사를 거쳐 오늘날 전 세계가 자본축적의 임무 아래 불평등한 하나의 노동분업 시스템으로 구조화된 단계예요. 이는 약탈적인 사냥꾼/전사의 사회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으로, 노동력을 낳는 이들이 식량을 기르는 이들을 부양하고, 이들은 다른 원료를 생산하는 이들을 부양하고, 또 이들은 공업 생산에 관련된 이들을 부양하는 과정을 포함해요. 이 과정 전체를 결국은 무기를 통해 통제하고 있는 비생산자를 부양하고 있다는 사실로 비추어볼 때, 현재의 시스템은 비생산자가 다른 이들이 생산한 것을 전유하고 소비(혹은 투자)하는 체계이지요.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대담하고, 도전적인 배움자료를 함께 읽으며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가장 큰 고민은 체제와의 연결을 인식하며, 그를 조금씩 바꿔내는 활동으로서 교육을 의미화하기 위해, 준비할 수 있을 언어와 방식이었는데요. '급진적으로' 느껴지는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연결하여 흔히 듣게 되는 질문을 제기해주신 분이 있었고, 관련된 생각을 나누었어요. 질문은 다음과 같아요. "이데올로기의 문제까지는 아닌 것 같고, 어디에 치우칠 필요는 없고, 여성도 남성도 결국 사람이니까,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될까요?" 예시 답변을 소개해요. 다른 답변과 방식을 더해가면 좋을 것 같아요. "결국 저희가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연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여성이 할 수도 있고, 남성이 할 수도 있고, 이런 사회를 장기적으로 지향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물론 자연적이라고 여겨지는 것, 그 구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포함하지만요.) 돌봄이나 살림이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되고, 여성이 돌봄노동, 가사노동을 하는 게 기존의 여성성을 강화하는 거라고 폄하될 수만은 없고, 그 가치가 온전히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건 어떤 지형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가가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적절한 비교인지는 모르겠으나, 예를 들어 학교 선생님이 반 아이들한테 '사이 좋게 잘 지내렴.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고유한 존재로서 만나야 돼.' 라고 하는 것은 참 좋죠. 지향해야 할 방향이 맞죠. 그런데 알고 보니 반에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있고 그룹화가 되어 있어요. 이 때 선생님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권력관계를 좀 흐트러뜨리면서 한 명 한 명으로 만날 수 있게 여러 가지 단계를 마련해서 교육적으로 개입하는 일환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과, 그런 권력관계에 대한 고심이나 충분한 개입 없이 그냥 좋은 말로 하는 것은 다르지요. 민감한 문제로, 정치적으로 여겨지는 문제는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럴 때 중립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기울어진 관계에 공모하는 것이잖아요. 의도하지 않더라도요.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꺼내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저희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참여자분들과 만날 때 이거를 동일한 언어로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요. 그분들이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페미니즘을 어떤 방식으로 접하고 인식하게 되는지,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 그리고 이렇게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우리가 장기적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세 가지가 각각 다른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마리아 미즈의 언어와 논리를 참고하되 새로운 언어와 논리를 만들어낼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세 지점 사이, 어디엔가 있는 것 같아 반가워요."